세명의 백인이 한 방에 앉아 있다. 겨울의 뿌연 빛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었다. 앞서 그들은 가장 복잡한 사건이 되었지만, 그전에 풀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은 정의의 중재자들이 되지 못했다. 전 축구 감독. 지역 FA의 의장. 가장 존경 받는 칙선 변호사. 물론 다양한 역할에서 걸출할지라도 지금은 그들의 경험을 훨씬 뛰어 넘어야 하는 자리에 있다.
전례 없는 사건: 그들에게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에 있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 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표면적으로는, 수사가 이루어진것 같아 보이지만, 단순히 다른 한명에게 향했던 한 사람의 말에 초점이 맞춰진 것 이다. 그 아래, 적어도 하나의 해석이, 설명하기 위해 학식이 필요한 문화 상대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이 세명은 그 단어적인 의미들의 뉘앙스에 따른 견해를 분석하고 법정으로 출두하기 위해서 잔혹한 운명에 의해 선택 되어야 했던, 변호사, 감독, 감사였다.
단어가 무슨 소용인가? 사용된 두 단어 모두 영어에는 동등한 의미의 말이 존재 하지 않는다. 피고자측과 기소자측은 양측 모두가 사용한 두 단어 - negro와 negrito - 는 우호적인 상황에서 사용되어 왔다. 여기서 '이 녀석'(pal) 이라는 단어가 우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실제로,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이에게 사용하지 않아도 친숙한 의미없는 감탄사로(Placeholder)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만약 글래스고에서 누군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때 던진 "뭘 보냐 이 녀석아 ("You looking me, pal?") 에서의 단어엔 우호적인 의미는 전혀 없게 된다. 단어의 의미는, 특히 플레이스홀더, 전달이라는 그 작은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종에 대한 언급은 어떠한가? 잉글랜드에서, 명백히 용납되지 않는다. 의문은 있을수가 없다. 더욱 우리가 살고 있는 평화가 번영하고 다문화 사회인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인종을 언급하는 나라가 아니다. 물론, 그런 문제가 잉글랜드에서 벌어졌다. 우리 나라에, 우리의 방식? 더 중요한것은, 인종차별자를 가해자가 사용한 말의 의도가 아니라 피해자의 자의적인 해석으로만 정의할 수 있는 우리의 교리이다.
그리고 게다가, 원고측은 그가 가진 문화 배경과 견해해서는 수용할수 있다고 변호 했다. 그의 나라에서, 묘사가 가능할 정도로 단순한 의미로 사용되고 함축적인 공격성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예를들어, 아르헨티나에서 후추를 그들의 언어로 '친구', '녀석', '이봐'(Mate, pal, man)와 같은 "che"라고 한다. 이 말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사용된다. 이 말은 좀 더 친숙한 단어인 Rubio, Gordo로 대체 가능하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큰 코를 가졌다면 닉네임은 큰 코가 된다. 머리가 크다면 큰 머리. 만약 어두운 색의 피부를 가졌다면 - 흑인(black, darker)이 아니라 - 그들은 negro이다. "a negro"가 아니다. negro가 민감한 단어일까? 전혀 아니다. 공격적으로 사용되고 상처를 줄수 있는 말이며 받을 수 있을까? 아니다.
두가지 논쟁은 그들 모두에게 이점이 있다. 만약 백인 잉글랜드 선수가 흑인 잉글랜드 선수에게 "N******" 라고 했다면, 쉽게 밝힐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두가 그 단어에 대한 영향과 따르는 비용을 알고 있다. 알고 있는 방식이 어떻든간에, 뉘앙스도, 콤플렉스나 복잡한 관계도 묻고 따질수도 없이무지와 거만함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사례의 경우, 주어지는 어떠한 처벌에도 - 또는 유예도 필요 없다, 이 경우 피고가 이 논쟁에서는 용어의 의미 중 하나의 뜻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받아들여진다 - 뉘앙스에 대한 반응은 없어야 할 것이다. 거대한 대가가 있는 작은 것, 우리의 문화 민감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무지에서 배우지 않으면 전적으로 수용할수 없는 것이 되버릴 것이라는걸 확실히 해야 한다. 출장정지는 그것에서 기이한 것일까?
슬프게도 아니다. 이 의도와 해석으로 인한 언쟁과 문화상대성 논란으로 복잡한 상황을 들여다 본 변호사, 감독, 감사는 정의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칼날을 들이댔다. 매우 엄격한 처벌, 조언. 이곳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우리의 규칙에 따라 플레이 해야 한다. 수용하던지 아니면 죽어라. 여긴 잉글랜드란 말이다, 환상적이다. 믿을수 없다.
축구협회(the FA)라는 독자적인 집단은 물론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아니다. FA는 사회에서 흥미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국가. 범행의사mens rea와 범행 모두를 소유하여 법으로 공격을 자행 할수 있는 사람이다. 본질적으로 그것 자체가 잉글랜드 국왕 영토에서 여지것 형사법원의 판결을 받지 않은 위법행위actus reus이자 범죄다. Roy Keane과 Alfe-Inge Haaland의 무릎에 대해 질문해보자. 가중 폭행죄인가? 아니다. 좋다 그러면 금지해야 하나? 그렇다. 실제로 기준이 없는 울퉁불퉁한 잔디밭의 한 부분에 FA가 있다. 그들의 관할권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관여 될수 있는 경우에만 그 규정이 개입될수 있을 것이다. 피치 위에 있던 이 한명은 면책특권을 가지고 있다.
-로이킨과 할란드: 로이킨은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할란드에게 태클을 당해 큰 부상을 당했다. 부상에서 복귀 후 다시 리즈 유나이티드 전, 보복성의 태클로 할란드를 부상시킨다.
이상해져 간다: FA는 단순한 판사나 배심원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고소까지 가능하다. 그것은 몬테네그로와의 경기에서 웨인 루니가 받은 퇴장에 대한 항의를 하면서 보여졌다. 3경기 출장 정지였지만 Uefa는 불확실한 처벌 구조를 받아 들이고 수용하여 단 2경기 출장 정지로 수정 되었다. 이것은 피할수 없는 흥미로운 논쟁거리다. 게임의 감시자로서의 방식 덕분에 구성 되었고 부인할수도 없다. FA의 존재는 클럽들이 근거없는 처벌의 범위를 원하는것이 아니다. Uefa는 다른 기준과 다른 관행이 있다는 것을 수용했다. 오캄의 면도날 Occam’s Razor의 법칙을 적용하자면: 몇가지 설명을 가장 간단히 하면 이러할 것이다. FA는 1인2역을 한다.
그들이 해서는 안되는 것은 법을 만드는 것이다. 수아레즈의 사건에서 전례없는 미디어의 판을 만들어 놓았다. 유죄 판결에 대한 항소, 결국 출장정지와 리버풀 구단의 공격성에 대해 받아들인것은 언론에 있어서 인종차별은 이 나라에서 어떠한 형식으로도 받아 들일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단계였다. 전적으로 옳다. 비록 그 이상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메스컴에의한 매체라던지, 징징거리는 나라, 이민자들은 이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하는것이 자신들의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고 할수 있는 사회적인 고정관념의 기본이다.
전적으로 괜찮다. 일관성이 쟁점이겠지만 말이다. 다음번에 영국인 커플이 두바이의 쇼핑몰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것으로 체포 되거나 공공장소에서 키스를 했다고 감옥행이 된다면 우리는 FA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언론 매체들이 UAE의 법체계를 비판할수 없을것이라고 추정할수 있다.

물론 그들은 비판할것이다. 위선은 영국인의 병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퍼져있는 역병이다.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에 포피 배지를 부착하는 것이 그들의 올림픽 대표팀 유니폼이 말비나스 제도(Malvinas)를 향한 갈등을 의미한다는 아르헨티나의 항의를 빠르게 받아들였고, 이것은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 1. 포피(양귀비 꽃):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최근의 전쟁까지 국가의 의무를 다하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하기 위해 매년 그 추모일에 가슴에 Poppy를 단다.
2. 말비나스 제도: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포클랜드 섬의 영유권을 놓고 포클랜드 전쟁이 벌어졌다. 그 지역을 영국은 포클랜드해 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해 라고 명칭한다.
이것은 받아들여 졌다. 영국의 문화는 너무나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수아레즈 평결은 세상에 내보였다. 패널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단어들이 공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피부색이 금기를 가늠하는 것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그들의 이념을 고려했다. 그리고 법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에 도달 했다. 우리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선봉에 섰다는 것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 다양한 의미로 -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른 이들은 우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설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들에겐 필요 없을 것이다; 남미에서 인종차별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다른 방식으로 처리한다.
게다가, 우리의 접근 방식은 엉터리다. 수아레즈를 가리켜 '남미인'이라고 지칭한 파트리스 에브라의 혐의가 있다. 축구선수가 해야 하는 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카를로스 테베즈와 가까운 에브라가 주장한 사실이다. 이것은 스페인어권에서는 다른 남미인들을 강하게 공격할때 사용하는 sudaco의 의미로 사용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아니다. 모욕에 대해 에브라에게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리버풀의 주장은,옳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려고 한다는 식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효과가 없었던 시도는 수아레즈에게 부정적인 교훈을 안겨다 주며 그의 이름을 더렵혔다.
어느쪽이 아니라도, 이 논리적이지 않은 상황은 많은 동정심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이 땅에서 피부색을 언급하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족성에 대한 금기는 어디있나, 국적이 아니다. 정확한 예는 아니지만: 친구중에 딱 수전노 구두쇠인 스코틀랜드인이 있다. 또 다른 한명은 수영에 잼병이인 흑인이 있다. 이 두 코멘트는 편견과 가장 진부한 것을 바탕으로 악의가 있고 오류가 있는 폄하하는 것이다(전적으로 위선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 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코멘트 중 하나는 당신을 움찔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아닐 것이다.
왜 태어난 곳도 아니고 부모의 고향도 아닌 피부의 색이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인종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거대하게 자행되어 왔고 외국인 혐호 또한 마찬가지다. 이 두가지는 무수히 많은 죽음과 셀수없는 공포를 초래했다. 이것은 내가 답할수 없는 물음이다: 자국의 영토에 있지 않다면. 인종차별이나 인종에 대해 매우 민감한 금기가 벌어지는 문화는 두가지 독 보다 더 한 맹독을 가지게 될 것이다. 색에 대해 깊게 자각하는 것은 이것을 언급하는 허가가 아니다. 거대한 위선으로 부터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not being quite as advanced as it claims to be.
-영국병(English disease, British disease)은 영국의 경제가 몰락한 원인이 됐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영국의 사회 현상을 말한다. 영국인들의 무기력함, 느린 동작, 방임적인 태도 등..
엉터리 해석이 많을수 있으니 원문을 보시길..
원문 : Hypocrisy: the English disease by Rory Smith 22 Dec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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